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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계트위터
  제  목 : [1/2] 오마이뉴스 - [속보, 정치] 2002년 10월 28일 (월) 06:30
  글쓴이 : 최고관리자     등록일 : 07-02-13 09:52     조회 : 5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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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 [속보, 정치] 2002년 10월 28일 (월) 06:30

옛 의병의 심정으로 법복을 벗어 김민석이 나를 노무현에게 보냈다



『 386 출신의 현직 판사가 ‘법복’을 벗고 노무현 후보 법률특보가 됐다. 현직 법조인이 정치계나 대선 캠프로 결합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참여 동기가 최근 한 386 정치인의 훼절을 보며 결심한 것이라 그의 특별한 정치입문이 화제가 되고 있다. 어제(28일) 노 캠프의 법률특보가 된 박범계 전 판사가 자신이 법복을 벗은 배경과 소감을 담은 글을 <오마이뉴스>에 보내와 전문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냈기에 고등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못하고 몇 년의 방황기를 거쳐 어렵게 들어간 대학이었다. 아버지를 대신해서 나를 키워준 할아버지는 못내 시국 상황이 걱정스러웠던지 1주일이 멀다고 학교를 찾아오셨다.

“데모 대열에 끼지 말어라.” 할아버지의 말씀은 늘 나의 어깨에 무거운 짐으로 내려 앉았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죽어나갔다. 그들의 꽃다운 생명이 채 피지도 못하고 거두어져 가고 있었다. 띄엄띄엄 양심에 떠밀려서 나갔던 거리는 청년에게 잠시의 위안과 명분을 제공해주었다.

최루탄의 화학 연기는 이를 거부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폐부 깊숙이 쳐들어왔고, 청년은 토악질을 하면서 열심히 뱉어내려 했다. 마치 사회의 온갖 부조리를 저 가슴 깊숙한 곳에서 부정하듯이.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청년은 단발마적으로 반항만 했지 그 반항이 왜 저항이 돼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았다.

그 때, 그들은 선두에서 있었다. 그래도 작은 일이지만 실천하려 노력했던 청년으로 하여금 언제나 비겁함을 느끼게 했던 영웅들이 있었다. 지금도 누구나 다 알만큼 유명했던 학생운동의 리더들. 85년에서 87년은 청년에게 위안과 자괴감이 교차하는 그런 시대였다.

87년의 분열 속에 우리는 패배했다. 역사의 진보를 믿던 자 모두에게 그것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손만 힘껏 뻗었지 몸의 중심은 마치 똥 누는 모습으로 엉거주춤했던 청년도 더 할 수 없는 실망과 패배감을 가슴에 담고 그 질풍노도의 시대를 정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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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들이 존경하는 선배, 고(故) 조영래와 노무현


시대는 암울했다. 보통 사람의 시대라고 위정자들은 선전해댔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주눅 들어 있었다. 인권과 정의는 주눅 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사치였다. 넘볼 수 없는 사치였다.

<연수>지 편집장이 할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어렵게 붙은 사법시험, 최상위에 속하는 합격 성적은 더욱 편집장의 실천을 가로막는 멍에로 작용했다.

서초·방배동의 선술집은 그 젊은 편집장에게 도피처였고,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지 않았던 그 많은 운동 가요는 편집장의 술 안주에 불과했다. 그 때, 예비 법조인들에게 설문조사를 한 적이 있었다. 가장 존경하는 법조인을 꼽아보라고.

고(故) 조영래 변호사가 으뜸이었다. 그 다음으로 꼽힌 사람이 노무현이었다. 고인을 인터뷰할 수는 없었다. 노무현에 대한 <연수>지의 인터뷰 내용은 사법연수생들에게 한 줄기 신선한 소나기였다.

80년대 양심과 명분의 뒤안길에서 그나마 양심을 지키려 했던 연수생들에게 삶의 지표이었다. 편집장에게도 판사가 되려는 삶의 목표에 내용이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예비 법조인은 그렇게 노무현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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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에게도 인권은 여전히 사치였다


어리석게도 3당합당을 반대하고 지역구도 타파를 외치며 실패해 가는 정치 역정을 거듭하던 노무현도, DJ에 의해서 30대 초반에 파격적으로 발탁돼 단 한 번의 실패를 맛보지 않고 잘 나가던 김민석도 판사에게는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저 사람, 노무현! 참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구나. 저 사람, 김민석! 정말 저 기세로 몇 년만 흐르면…. 판사에게는 그 이상 이하의 특별한 소회가 있지 않았다. 오히려 판사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최초의 문민정부 아래서도 줄어 들지 않는 대학가와 산업현장에서의 대량 구속자들이었다.

지난 96년 8월 15일 연세대학교에서 벌어진 범청학련 통일축전(소위 한총련 사태)은 당시 정부에 의해서 불법 집회로 규정돼 금지된 행사였다. 대량의 구속자를 예고했던 첫 구속영장 청구 사건이 판사의 당직사건이 되었다. 집회에 참가하려고 학교 구내로 들어가다 이를 제지하는 경찰과 충돌한 지방 학생에 대한 영장이었다.

판사에게는 그의 죄가 그다지 무겁게 보이지 않았다. 헌법과 법률과 양심에 따라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신문과 방송은 이를 크게 보도했다. 그 때부터 수 주일 동안 판사의 근무실과 집에는 날이 선 쇳소리의 협박 전화가 쇄도했다. "자네 아들 잘 크고 있지?"

법원장에게 신변 보호를 요청했지만 판사의 아파트에 다녀간 경찰기동대 차량의 형사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나의 사상을 물어보는 수사관으로 전락했다. 인권을 보호하고 정의를 심판하는 판사에게도 여전히 인권은 사치였다. 세상은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고, 판사가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그 일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가슴 벅찬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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