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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계트위터
  제  목 : 대전일보 - 재판을 받은 어느 판사 이야기
  글쓴이 : 최고관리자     등록일 : 07-02-13 09:43     조회 : 1311    
재판을 받은 어느 판사 이야기-박범계


지난 4월 어느 토요일 오후2시쯤 서울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정체가 되어 잠시 갓길로 나가 아들놈 쉬를 누이고, 우유를 타서 입에 물린후 채 5분도 안되어 주행차로로 들어왔었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난 어느날 갑자기 범칙금 납부통고서가 날아왔다. 내용인 즉 갓길 운행을 하였다는 것이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급한 김에 잠시 갓길에 정차했던 나로서는 너무나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느날 퇴근하던 중 잠시 시간을 내어 경찰서에 들러 교통과장을 만나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관련자료를 볼 수 있었고, 필자의 위반사건이 어떤 시민에 의해 신고된 것이며, 그에게는 소정의 보상금이 지급된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이렇게 신고되어 경찰관이 범칙통고를 한 후에는 정식 절차로 이의하는것 외에는 달리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말까지…. 경찰서를 뒤로하며 괜히 판사신분을 이용했다는 자괴감과 일선 경찰에서 투명하게 사건을 처리하고 있다는 신뢰감이 교차했다.

그러나 억울한 생각은 여전히 쉽게 가시지 않았다. 필자를 신고하고 고발한 그 시민이 나의 갓길 정차가 공중 교통의 안전에 위험을 초래하였다고 판단하고 난 뒤의 신고였는지가 궁금하였다. 과연 시민에 의해서 각종 교통법규위반사건을 상호 감시해서 신고케 함으로써 그 위협으로 교통질서를 확보하겠다는 발상이 자유민주적 시민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는 것인지, 그 보상금은 시민의 세금에 기초할텐데 시민적 합의는 확보하였는지, 요즈음에는 보상금으로 한몫 하겠다는 소위 '꾼'들이 많이 생겼다는데, 그들의 눈에 어쩔 수 없었던 만부득한 사정들이 보여 질는지, 그들이 첨부한 사진에는 그러한 사정이 담겨있지 않을텐데 이를 심사하는 경찰관이 그러한 사정까지 고려해 줄는지 등등 의문은 끝이 없었다.

즉결이나 과태료 재판을 담당해본 경험이 있는 필자로서는 과거 그러한 사건을 처리하면서 위반자들의 장황한 호소와 변명을 일소에 부치기도 했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막상 필자가 그와 같은 일을 당해보니 그렇게도 억울함을 호소했던 그 많은 시민들의 이야기에 내가 진지하게 귀기울이지 못했던 것이 아니냐는 반성도 생겼다.
범칙금납부통고를 받고 그냥 돈을 내고 말려고도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쯤 되니 오기가 들었고, 이의절차를 경험해보고 싶은 호기심까지 들었다. 그래서 소정기한까지 이의를 하지 않았더니 드디어 금액을 추가하여 과태료납부통고서가 집으로 날아들었다. 날을 잡아 단단히 결심을 하고 가까운 경찰서로 이의를 하러 갔다. 그러나 경찰서 어디에도 과태료 납부처분에 대한 이의신청의 절차를 안내하는 표식은 없었고, 민원실에 물어 관련부서에 찾아가 담당 경찰관에게 이의신청을 하겠다고 말하였더니, 경찰관은 그 절차를 안내해 주기는커녕 왜 이의를 하려고 그러느냐, 위반한 것이 사실아니냐는 등의 대답을 통해 마치 이의신청에 대해서 예비심판을 하려 하였다. 정작 그 부서에는 이의신청을 할 만한 양식도 구비되어 있지 않았다.

눈에 불을 켜고 돈좀 벌어보겠다는 꾼들이 도처에 있을 것이고, 그만큼 억울하다고 느끼는 시민이 상당수 있을 터인데, 이의신청절차가 잘 정비되어 있지 않다면 판사에 의한 권리구제는 공염불 아닌가? 백지에 이의신청서를 작성한 후 동료판사로부터 재판을 받았다. 다행히 그때의 사정에 대한 필자의 호소는 받아들여져 불처분결정을 받았지만, 최초 범칙금납부통고를 받고 과태료재판을 통해서 권리구제를 받기까지는 너무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됐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필자가 담당하는 모든 재판사건이 필자 앞에 놓이기까지는 무수한 결심과 많은 시간 및 비용이 투입된 결과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느낄 수 있었고, 권리구제의 최후의 보루인 판사로서 좀더 신중하고 세심한 배려와 결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짐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대전지방법원 판사 <대전일보>
[이 게시물은 관리자님에 의해 2017-06-29 10:41:19 연설및칼럼에서 이동 됨]